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다나카 기이치 (문단 편집) === 육군대신 시절 === 하라 내각에서 육군대신이 된 후 남작위를 받고, 육군[[대장(계급)|대장]]으로 승진하는 등, 이대로 가면 [[원수(계급)|원수]]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는 평판을 들었다. 시베리아 출병을 주도하는 등 팽창정책에 앞장섰으나, 1920년 이후엔 출병이 출구전략없는 진창이라고 판단하고 즉각철수론으로 입장을 바꾸었다. 그러나 곧 [[협심증]]으로 쓰러져 한직인 군사참의관으로 전보, 요양 생활을 하였고, 시베리아 철수는 1922년 내각이 한번 바뀌고 나서야 이루어졌다. 다나카가 워낙에 거물이었던 까닭에, 그가 쓰러진 뒤에도 이른바 무당파 운동이라든가 키요우라 내각으로 귀결된 연구회 내각 등 현직 시절부터 총리 후보로 몇 번 이름이 거론된 적이 있었으나, 그가 본격적인 정치가로 전업을 한 것은 [[정우회]]([[입헌정우회]], 政友會)의 분열로 인해 [[다카하시 고레키요]]가 정우회 총재직을 사임하면서 부터이다. 당초 가장 유력한 총재후보였던 [[요코타 센노스케]]는 와병중으로 죽어가고 있었고, 당외인사에서 총재을 영입하기로 하였는데, 이토 미요지나 고토 신페이 등이 거절하면서 요코타가 밀던 다나카 기이치에게 차례가 돌아온 것이다. 정우회 입당 시에 300만엔을 지참한 것으로 인해 육군대신의 관방기밀비를 횡령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받았으며, 총재 취임 후에는 군부대신에 문관 및 예비역만 앉힐 수 있도록 한 정우회의 정책을 파기하고 모리 가쿠, 구하라 후사노스케, 스즈키 기사부로 등 국수주의에 가까운 인물들을 영입하여 정우회의 색채를 친군부로 바꾸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